디자인을 만나 새로 태어난 한글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잘 그리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한글은 영문 알파벳보다 글자 수도 많고 구조가 복잡해 디자인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리고 디자인해도 전혀 멋스럽지 않다고. 그러나 최근 한글 디자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다루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폰트를 제작하거나 한글 레터링을 작업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잘 그리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zesstype의 거울 <거울. 2015>

가로쓰기가 가진 어려움

한글이 우수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며 그 창제 정신이나 과학적 원리, 구성 등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놀랍다. 이렇게 뛰어난 한글이지만 이를 실제로 다루거나 디자인한다면 말은 달라진다. 한글은 영문 알파벳에 비해 조형이 복잡해 디자인하는 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한글 디자인이 어려운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가로쓰기(횡렬)라는 점이다. 물론 영문 알파벳의 경우에도 가로쓰기(횡렬)를 따른다. 그러나 영문 알파벳은 처음부터 가로쓰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해당 알파벳을 풀어 쓰면 된다. 그러나 한글은 본래 세로쓰기 형식이다가 1945년 조선교육심의회의 제안으로 쓰기의 형식이 바뀌게 된다. 이로 인해 글줄의 축을 잡고 단단하게 지지해 주던 중성이 역할을 잃어버리면서 조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글자의 축이자 척추가 사라지자 글자의 정렬 문제도 생겼다.

글랩디자인의 <흘림, 한글의 미학>

모아쓰기로 인한 조화로움 문제

또한, 한글의 경우 자모를 음절 단위로 조합하여 적는 ‘모아쓰기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성돼 있고 각각의 글자를 합해서 쓴다. 이로 인해 한글 폰트를 디자인을 할 때 생기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균형감’이다. 모아쓰기 방식에 따라 초성, 중성, 종성의 각 글자들은 합쳐져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자모가 위치에 따라 크기와 균형을 달리하며 전체적인 무게감을 맞춰야 한다. 같은 이응이더라도 초성에 오느냐, 중성에 오느냐, 종성에 오느냐에 따라 그 크기를 조금씩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각 글자의 강약 조절과 전반적인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렵다.

또한 획 수에 따른 밀도 차이로 인한 문제도 있다. ‘그’, ‘를’, ‘니’, ‘빼’ 등의 단어들이 대표적 예이며 가장 밀도가 높은 글자들은 ‘쀏’, ‘쒰’, ‘휋’ 같은 글자이다. 이 경우 한 글자를 한 프레임 안에 채워 넣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다른 글자와 조화를 이루는 것도 어렵다. 어울림을 위해 비슷한 굵기와 크기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글자를 조절하고 균형을 맞추는 데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글랩디자인의 <겨울>

많은 글자 수,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

마지막으로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비롯해 글자 수가 많다. 음소문자이면서 모아쓰기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수천 개의 음절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 개의 폰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많게는 만 개가 넘는 글자를 일일이 다 디자인해야 한다. 이로 인해 폰트 하나를 만드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과 품이 든다. 서체 개발사의 경우 그 기간이 비교적 짧은 편이지만 독립 디자이너의 경우 최소 6개월에서 최대 몇 년이 걸릴 정도로 한글 폰트 제작과 한글 디자인에는 노력이 따른다.

디자인이 어려운 한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디자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글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은 폐쇄적이었던 활자 디자인 영역에 대해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가 본격적으로 교육을 진행하면서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저작권 강화 역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서체는 당연히 컴퓨터에 내장돼있거나, 손쉽게 다운받아 무료로 사용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폰트에 대한 저작권 단속이 강화되면서 독립 디자이너들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서체 개발사를 넘어 폰트 개발에 뛰어든 독립 디자이너들이 많아지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독립 디자이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서체 역시 다양해지며 폰트의 트렌드가 생기고 있다. 또한 폰트 개발뿐만 아니라 한글을 가지고 레터링 하는 디자이너들도 많아지면서 한글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가 이전과 다르게 높아지는 추세다.


ZESSTYPE 현승재 디자이너

‘ZESSTYPE’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승재. 그는 주로 전용 서체 개발과 레터링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마포구청에서 진행하는 타입 디자이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에도 참여 중이며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글자 조형 교육도 진행 중이다.

그가 폰트 개발을 시작한 이유는 꽤 단순하다. 내가 쓰고 싶은 서체, 맘에 드는 서체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처음 그래픽 디자인을 시작한 그는 디자인에 필요한 한글 서체가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한글 서체의 다양성을 위해 서체 개발과 레터링 작업을 시작한다.

현승재 디자이너는 한글도 매력적이지만 글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래피티로 디자인을 시작한 그는 김기조 디자이너나 다른 디자이너들의 레터링 작품을 보고 잘 쓴 글씨나 문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한글 디자인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한글 폰트 디자인에 있어 가장 신경 써야 할 점으로 조형을 균일하게 그려내는 것과 구조를 안정감 있게 설계하는 것을 꼽았다. 또한 사용성과 판독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현승재 디자이너는 레터링에 자신만의 조형적인 특징을 과감하게 집어넣는다. 다양한 형태의 한글 서체를 원하는 그의 목표는 주제나 콘셉트에 맞는 서체를 채워나가는 것이다. 조금 실험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SF’ 등 각 분야에 해당하는 강한 인상의 서체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현승재 디자이너의 또 다른 특징은 주로 무거운 글자를 많이 그린다는 것이다. 굵고 어둡고 회색도가 짙은 글자. 편안한 글자보다는 강한 글자를 그리는 것이 그의 서체 특징이다. 그래피티로 디자인을 시작해 굵은 글자가 익숙하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처음 만들었던 서체도 ‘퍼스트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납작하고 굵은 글자이다. 이후에 개발한 검은 고딕나 흑운체 역시 맥락을 같이 한다.

그에게 가장 애착하는 작품을 물어보자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e)’라는 글자를 골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극 중 사람이 기중기 같은 기계에 사람이 타고 내려와 신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글자에 서사를 담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해당 단어의 의미를 살려 명료한 표현으로 레터링을 구사한다.

최근 그는 ‘배리어블 폰트’를 활용한 레터링 실험을 하고 있다. ‘배리어블 폰트’는 과거 굵기 별로 여러 종의 서체를 제작하는 것과 다르게, 한 종의 서체 안에서 무게, 기울기, 조형 등의 축을 사용자가 직접 조절이 가능한 서체이다. 이를 레터링에 활용하면, 클라이언트가 조형과 표현에 직접적인 피드백을 주거나, 결과물 또한 조절이 가능한 상태로 제공할 수 있으니 매력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글랩디자인 이강우 디자이너

‘글랩디자인’이라는 활동명으로 디자인하고 있는 이강우 디자이너. 그는 주로 캘리그라피와 레터링 작업을 하고 개인적으로 서체 개발도 진행 중이다.

그에게 한글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한글의 탄생』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본인의 언어학 시점에서 한글에 대해 풀어 쓴 책인 『한글의 탄생』. 한글이 창제되는 과정과 원리에 대해 분석이 나와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는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한글의 역사와 개요, 한글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하는지 나와 있는 안상수 디자이너의 『한글 디자인 교과서』라는 책을 본 후 본격적으로 한글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다.

“한자의 경우 붓으로 글씨를 쓰잖아요.
그런데 한글은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닌
글자를 그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원리를 알게 된 후 더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 한글을 다루기란 꽤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작업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 자체가 매력이라고 답했다.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은 만큼 보람과 쾌감 역시 크다는 것이다.

그가 한글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가독성이다. 글을 디자인하는 일인 만큼 사람들이 글자를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작품에 무게를 싣고 작품마다 의미를 부여했지만 최근에는 작품에 친근함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물어보자 ‘사랑’이라는 작품을 꼽았다. ‘사랑’은 3D로 작업한 작품이다. 이는 기존에 그가 작업하던 작품의 스타일과는 사뭇 다르다. 이전에는 2D로 한정 짓고 평면에서 글자가 잘 보이도록 하는 것에 집중했던 반면 ‘사랑’은 3D 작업을 통해 입체감을 살리고 글자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상을 전공해 자주 다뤘던 3D 툴을 레터링에 적용시킨 것이다. 또한 붓으로 흘린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장식적인 부분은 뒤로 미는 등 디테일을 살린다.

3D 레터링 작업에는 그만의 개성이 담겨 있다. 서예를 전공해 글자의 강약 조절에 능숙한 그는 이 부분을 살려 글자의 입체감을 표현한다. 또한 현재 한글을 가지고 3D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강우 디자이너만의 독보적인 작품이 탄생하고 있다.

Credit
Editor
PhotographZESSTYPE, 글랩디자인 제공
Reference
  • 센터플러스
© DIGITAL iNSIGHT 디지털 인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콘텐츠는 저작권법 제7조 규정된 단서조항을 제외한 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입니다. 본 기사를 개인블로그 및 홈페이지, 카페 등에 게재(링크)를 원하시는 분은 반드시 기사의 출처(로고)를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출처 없이 본 기사를 재편집해 올린 해당 미디어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절차(지적재산권법)에 따라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Related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