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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오퍼레이터처럼 보여도 괜찮아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평범한 서비스 기획자들의 고민을 다루는 두 번째 시간. 소위 ‘운영 기획’을 하는 인하우스 기획자들은 서비스 조직이 복잡해짐에 따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스스로 제안해서 진행하는 창의적 업무가 아닌 현업의 요청을 처리해야 하는 ‘오퍼레이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운영 업무를 반복하는 것은 서비스 기획자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소비만 되는 것일까? 오퍼레이터가 되지 않는 운영 기획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

  1. 포스트잇이 없어도 괜찮아
  2. 오퍼레이터처럼 보여도 괜찮아
  3. 기획자, 기술직이 아니어도 괜찮아
  4. 신기술이 아니어도 괜찮아
  5. 대한민국의 기획자도 특별하다

여러 개의 작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던 신입 기획자는 마음이 조급해지고는 한다. 멋진 서비스를 기획하고 싶어서 왔는데 현실은 이미지 배너를 넣는 인벤토리 구좌를 추가하고 텍스트를 변경하는 단순한 일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데이터 수집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주요 지표만 점검한다. 이런 단순한 일조차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절차가 필요하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창의력을 쓸 여유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 속상한 건 입사하기 전까지 이런 현실을 전혀 모르다가 시작했다는 점이다.

왜 ‘나에게 큰 서비스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면 내가 생각했던 길이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에게 내려오는 작은 건들은 반복적이라 성장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혹시 무의미한 반복만을 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서비스 기획자들에게 이러한 고민은 흔하게 일어나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은 기획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기획자가 되고 싶은 지망생들은 요즘 포트폴리오 준비를 많이 한다. 포트폴리오 대부분은 세 가지 유형에 해당한다.

첫째, 상상 속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기 위한 기획문을 써오거나 다른 사람들과 앱을 만들어본 경험을 작성해오는 경우, 둘째, 흔히 ‘역기획(Reverse Planning)’ 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기존에 존재하는 서비스를 와이어프레임과 화면설계서(SB. Story Board) 형태로 다시 작성해오는 경우, 셋째, 입사하고 싶은 회사의 서비스를 기반으로 개선을 기획하는 경우.

서비스 기획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UX나 서비스 디자인을 교육하는 대학교 수업에서조차 이러한 방식으로 기획 업무를 맛보도록 한다. 물론 이런 활동은 여러 가지 시각에서 온라인 서비스를 이해하는 것이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본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산출물 중심의 UI 형태와 산출물이 가진 정책에만 집중한 접근방식으로, 초기 기획자의 고민을 가중한다. 실제 기획의 업무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비스의 구성에는 실제 기획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작용한다. 고객에 대한 고려뿐 아니라, 실제 서비스가 운영되는 시스템과 인프라,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와 비즈니스 조직의 니즈와 관련 법령까지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하면, 눈에 보이는 UI 적인 차원에서 추론 가능한 것들로만 추론하기 때문에 실제 비즈니스가 진행되면서 진행되는 기획업무의 수많은 과정과 중요성은 간과되기 쉽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소위 ‘이상적인 기획업무’는 새로운 서비스의 전체 프로세스를 만드는 ‘구축’과 기존 서비스의 단점을 찾아내서 모두 뜯어고치는 ‘개선’에만 집중이 되기 쉽다. 물론 눈에 보이는 UI 적인 것만 안다면 구축도 개선도 직접은 할 수 없지만,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커다란 변화만을 기획하고 싶어지는 것이 더 문제다.

정말 그럴까? 오로지 신규서비스를 통째로 새로 하는 기획만이 기획자의 역량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소위 ‘운영 기획’이라고 불리는 작은 변경 건들을 담당하는 것은 기획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하우스 기획자의 역할

국내의 서비스 기획자는 계약 형태에 따라 인하우스 기획자와 에이전시 기획자로 나눌 수 있다. 인하우스 기획자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에 직접 계약된 형태로 일하는 기획자를 의미하며, 에이전시 기획자는 에이전시에 속해서 타사의 서비스를 필요한 시점에 대행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획자다. 실제 서비스의 구석구석을 기획하고 개발 및 디자인과 협업해 실제 산출물을 구현해낸다는 점에서 두 기획자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프로젝트 진행의 관점에서는 일하는 시점이 흔히 다를 수 있다.

기획자가 투입되는 시점을 서비스 프로덕트의 상태에 따라 구분해볼 수 있다. 개발에서 흔히 SI(System Integration, 시스템 통합)와 SM(System Management, 시스템 관리)으로 구분되듯이 기획자도 ‘구축’ 시점의 기획업무와 ‘운영’ 시점의 기획업무는 다르다.

구축은 처음 서비스가 만들어지기 위한 프로젝트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기획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은 UI 설계가 아니라 ‘정책과 비즈니스 모델’이다.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이럴 경우 대규모의 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에이전시를 선정하는 RFP(Request For Proposal, 제안요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인하우스 기획자는 비즈니스 설계를 해야 한다. 내부의 현업 조직과 실제 법적·재정적 상황과 전략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 포인트와 큰 프로세스에서 고객 서비스의 형태를 기획한다.

RFP가 작성되면 정식 절차를 통해 여러 에이전시의 제안을 받아 에이전시가 결정된다. 이제부터 상세 구축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프로젝트의 주인이 되는 인하우스의 기획자와 실제 프로젝트 실무를 함께 해나갈 에이전시 기획자도 함께 하게 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아주 세부적인 화면의 정책들과 비즈니스 모델과 서비스 디자인이 매끄럽게 되도록 모두가 힘을 더하게 된다.

서비스가 최초 그랜드 오픈을 하게 되면 일정한 안정화 기간에 오류를 수정하고, 구축을 진행한 외부 기획자들은 순서대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제 서비스 프로덕트는 ‘서비스 운영’의 상태가 된다. 계약의 형태에 따라 일부 에이전시의 기획자가 계속 남을 수도 있지만 이제 내부 인하우스 기획자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목표한 전략에 맞도록 프로덕트를 계속 감시해야 할 뿐 아니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면 전략조차도 빠르게 수정되는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운영기획의 수준이 미미했고 대부분 기능을 미뤄두었다가 한꺼번에 구축에 가까운 리뉴얼을 했다. 하지만 모바일 시기 이후에는 서비스 경험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운영하면서 지속적인 전략 개선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운영업무는 단순히 고객 편의 차원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세부 업무를 실행하는 내부 직원들의 불편사항을 개선하거나 수익을 방해하는 최초 정책의 개선을 위해서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실제 내부와 외부 고객들의 생생한 의견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유효하게 만드는 실행이 필요하다.

요즘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소위 ‘그로스 해킹(Growth Hacking)’을 통해 실행과 개선을 하는 것도 운영에 포함된다. 그로스 해킹이란 서비스, 프로덕트의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핵심성과지표)에 대한 가설과 데이터를 수집하고, 현재 이용자나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빠르게 개선해나가면서 서비스를 성장시켜나가는 전략을 의미한다. 모바일 시대로 넘어오면서 비슷비슷한 서비스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각광받고 있는 개선 방법론이다. 대규모 리뉴얼을 통한 서비스 개선에 비해서 비용은 더 적게 들지만 효과는 더 직접적일 수 있다는 점이 이것을 대세 전략으로 만들었다. 특히 GA(Google Analytics) 등 BI(Business Intelligence)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운영 개선의 영역은 점차 성장하고 있다.

오퍼레이터처럼 보여도 괜찮아-오퍼레이터, 서비스, 롯데닷컴, 기획자
운영 기획의 영역인 그로스 해킹

즉, 서비스를 최초로 만드는 것은 구축이지만 서비스를 확장하고 성장시키고, 이를 실제로 지탱할 수 있는 내부의 프로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운영 기획의 몫이다. 때문에 인하우스 기획자는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 회사의 전략을 강화하거나, 전략을 판단하고 실행하기 위해 많은 영업과 마케팅 등의 현업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상상했던 기능의 일정 내 구현을 목표로 하는 구축의 과정보다 고객과 비즈니스에 더욱 더 촘촘히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니어 기획자의 눈에 운영 기획 업무는 상대적으로 재미없어 보이기 쉽다. 운영 기획의 영향 범위는 구축 프로젝트 기획에 비해 난이도와 범위가 적고 화려하지 않다. 사내 현업 실무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도 많다. 물론, 일부 운영 서비스에 새로운 기능을 더하기 위해 프로세스와 신규 비즈니스를 추가하기도 하지만 인하우스에 있는 주니어 기획자에게 처음부터 프로젝트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주니어에게 주어지는 업무는 이보다 훨씬 간단한 업무들이다.

운영 기획자는 ‘오퍼레이터’일까

인하우스 서비스로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기획자라면 이미 서비스가 구현돼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터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운영 기획 업무가 잔뜩 쌓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운영 업무는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라 상대적으로 난도가 낮은 업무가 주니어 기획자에게 주어지게 된다. 난도가 낮은 업무는 업무를 익히기에 굉장히 적합하다. 기획 및 프로젝트의 프로세스와 메커니즘은 전부 따르면서도 영향 범위가 작고 상대적으로 정답이 있는 업무가 많다.

물론 처음에는 그 하나도 어렵다. 밖에서 고객의 눈으로만 볼 때는 보이지 않던 복잡한 정책부터 어드민(관리자)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세스까지 익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조직이 커질수록 현업 팀 간의 이익이 서로 대치되기도 한다. 광고팀은 당연히 광고 제휴가 비용 효율적으로 성과 있게 운영되어야 하기에 트래픽 양을 조절해야 하지만, 전체적인 트래픽이 적다면 영업 팀에서 매출 부진 사유로 지적할 수 있다.

현업 팀 간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고 기획과 개발의 범위를 생각해내는 것은 주니어가 입사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다. 시니어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기준을 세우고 프로젝트를 끝내보면 뿌듯함에 기쁘다.

하지만 이 일도 어느 정도 반복을 하게 되면 업무순서를 외우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의 순서를 파악하고 나면 비슷비슷한 프로젝트라는 반복 업무에 치이기 바쁘다. 첫 프로젝트 오픈의 기쁨은 퇴색되고 스스로 ‘오퍼레이터’처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퍼레이터란 ‘컴퓨터를 이용해 지시된 업무를 대행해주는 사람’의 의미로 쓰였다. 자신의 창의력과 기획력을 사용하지 않고 현업의 요청이나 윗사람의 지시대로 문서를 대신 작업하고 대신 개발에 요청해주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오퍼레이터처럼 보여도 괜찮아-오퍼레이터, 서비스, 롯데닷컴, 기획자
화면설계서를 만드는 오퍼레이터일까? (출처. Fabian Irsara on Unsplash)

산출물 관점에서 보자면 국내 기획자의 업무는 UI 구성요소의 기본설계와 이를 개발하고 디자인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는 화면설계서로 이루어진다. 애자일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많은 툴이 도입되었지만 기획자는 여전히 UI 구성 업무에서 완벽히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UI 디자이너에게 UI 구성 업무를 위임하고 정책과 산출물 수준에만 신경 쓰고 싶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스케치(Sketch)’ 등의 툴을 이용해 디자이너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 기획의 대상이 단순하고 요청자가 UI 까지 명확하게 요청을 하며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기획자는 스스로가 프로젝트 진행 대행만 하는 오퍼레이터라고 느끼기도 한다.

UI 디자이너가 기획의 역량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문제다. 아직 초보인 서비스 기획자가 현업과 협의하여 겨우 만들어낸 화면설계서를 전달했는데, 디자이너에게 기획내용에 대해서 수많은 질의를 받고 현업과 디자이너 사이에서 앵무새처럼 전달만 하다가 결국 최초 기획과 완전히 다른 UI로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의 업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된다.

개발자와 협업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부 커뮤니티의 개발자들은 기획자 역할 자체의 무용론까지 제기한다. 온라인에서 유명한 한 포스팅 ‘기획자는 왜 IT 기업에서 점점 사라져가는가(seokjun.kim/why-engineers-become-ceo)’에서는 단순히 UI를 짜는 기획자의 역할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비스의 비즈니스 관점에서 궁극적인 요청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오히려 기획자가 업무를 복잡하게 만들고 서비스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 쉽고, 소위 기획자에 대한 무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기위해 고급 개발자를 모셔오고 비용상 기획자는 갓 졸업한 디자이너 출신으로 뽑아놓는 경우다. 기획자는 노련한 개발자에 비해 UX나 비즈니스 정책을 정의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경험 많은 개발자에게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케이스별 정리나 하고 개발에서 코치하는 방식으로 개발 내용도 수정하게 된다. 그럴 때면 기획자는 결국 고민하게 된다. 자신의 역할이 혹시 개발자를 위한 잡일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기획자의 역할이 제대로 정리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퍼레이터가 아닌 기획자가 되는 방법

옛날 나의 선배 중 한 분은 “길에서 아무나 데려와 보름만 가르치면 누구나 화면설계서를 그릴 수 있다”고 단언했다. 당시 기획직무에 대한 애정이 퐁퐁 솟아나던 나는 세상이 무너지듯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화면설계서에 관해서라면 선배의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다.

화면설계서를 작성하고 개발자와 디자이너에게 요청하는 것만이 기획자의 가장 중요한 스킬이라면 기획자의 역할은 속된 말로 ‘영혼 없이도’ 할 수가 있다. 앞서도 잠시 말했듯이 현업의 요청사항도 충분히 UI나 기능에 대해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 온라인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온라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서 기획자에게 아이디어를 요청했던 현업이었지만,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벤치마킹하는 경쟁사에서도 서비스 대부분은 온라인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현업 담당자부터도 온라인 사용 경험이 많아져, 요청할 때 확신에 찬 태도로 UI 그림까지 그려 넣고는 한다. 기획자의 영혼을 내려놓고 요청자의 요청대로만 진행해도 사실상 무방하다. 하지만 이런 반복은 운영 기획에서 스스로 오퍼레이터가 되는 것을 자초하는 행위다.

과거 신입사원 시절 입사 후 2개월쯤 됐을 때였다. 재고가 한정된 상품을 24시간 동안만 딜 형태로 파는 ‘one-a-day deal’ 매장을 기획하고 있었다. 요청을 발의한 부서인 마케팅 플랫폼 담당자였던 차장님은 내 평생 가장 어려운 미션을 주셨다. 수정 시안만 일곱 번째였다. 긴박한 느낌을 주려고 타이머도 넣어보고, 폭탄 터지는 품절 임박 딱지도 붙여보고, 온갖 디자인을 바꿔보았지만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케팅팀의 차장님은 타이머가 째깍대고 구매 수량이 표시되고 긴박한 품절 임박 딱지를 붙이고 눈에 띄게 디자인을 해놓으면 분명 고객이 긴박한 느낌으로 구매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풋내기 기획자였던 나는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와이어프레임을 고치고 담당 디자이너를 괴롭혀가며 시안을 수정했다. 담당 디자이너와 몇 날 며칠을 시안 앞에 둘러앉아 대체 ‘긴박해 보이는 느낌’이 뭔지 모르겠다고 힘들어했다.

결국 서비스를 오픈했고 나름 괜찮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매장이 왜 좋은 성과가 나왔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서비스를 만들지만 그 서비스의 고객에 대해 적절한 가설을 세우지 못했고, 매출 외에 이 매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기준이 되는 KPI를 확인해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서비스에 있어서 요청자가 바란 기능을 구현하려고만 노력한 오퍼레이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서비스 기획자로서 이 운영 건은 어떻게 처리했어야 했을까? 다시 한번 서비스 기획자 업무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서비스 기획자는 비즈니스적인 목표 또는 문제를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서 해결하는 안을 제시하는 직무를 가진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고객의 사용자경험과 실제 자사의 시스템과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실제로 구현 가능 한 해결책을 표현해내는 것이 그의 업무다.

수많은 UX 서적에서는 사용성 테스트나 현업 필드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요청사항(Want)이 아니라 그들도 표현 못 하는 니즈(Needs)를 발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현업의 요청을 처리할 때에도 현업의 안이 아닌 그 내면에 숨겨진 니즈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요청한 그림은 그저 요청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이지 UX적으로도 시스템적으로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오퍼레이터처럼 보여도 괜찮아-오퍼레이터, 서비스, 롯데닷컴, 기획자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현업 담당자가 “메인의 상품을 전시할 인벤토리를 늘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추가 구좌를 그려왔다고 해보자. 실제로 원하는 것은 ‘특가 상품의 유입을 늘리는 것’이다. 만약 현업 담당자가 그려온 영역이 생각보다 클릭이 많이 일어나는 영역이 아니라면, 현업 담당자가 전시하고 싶은 그 상품의 특성에 맞는 더 좋은 영역을 알려주거나 아예 타깃팅된 푸시 발송을 하는 쪽이 더 효율이 높을 수 있다고 판단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복잡한 개발 과정이 될 수도 있고 기존의 기능을 이용하여 아예 개발을 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업에서 요청한 ‘궁극적인’ 요청의 이유에 맞는 적절한 문제해결 방식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나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보자. 나를 울린 그 차장님의 요청은 “긴박한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해달라”였다. 사실상 이 질문의 핵심 니즈는 “판매가 잘 일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큰 차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차이는 굉장히 크다. 그 차장님에게는 판매가 잘 일어나게 하려면, 긴박한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주효한 전략이라는 대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서비스 기획자라면 이러한 말의 근거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만약 근거가 부족하다면 앞으로 만들어낼 서비스의 실제 비즈니스에 대해서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제대로 파악했어야 했다.

적절한 질문 ①

“이 매장에 들어오는 상품은 어떤 특징이 있어요?”

매장이 운영되면서 그 매장의 상품은 1+1처럼 벌크(Bulk. 무더기 재고)가 많아 단가가 할인되거나 특별한 사은품을 대거 제공하는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행사가 거의 없는 유명 브랜드 상품이 많았다. 매장이 긴박감이 넘친다고 해도, 상품도 보지 않고 주문을 하는 고객은 없다. 그렇다면 이 매장이 흥행했던 것은 한정된 시간에 기존에 없던 혜택을 줬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파악을 하려고 했다면 고객이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들만한 ‘요소’가 무엇이 있는지부터 분석했어야 했다. 그리고 매장에서 그 요소를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했어야 했다. 배치하면서 평소 공부한 UI 공식들을 통해 배치나 인터랙션을 만들었어야 했다.

적절한 질문 ②

“장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구매를 미루지 않고 즉시 구매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운영하던 중에, 사은품이 다 소진돼 24시간을 못 채우고 상품을 변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주해 온 상품의 재고는 거의 무제한일지라도 사은품은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요청자는 ‘구매자 수’를 강조하면 따라서 살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구매자 수가 많다고 나도 빠르게 사야 한다는 생각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오히려 홈쇼핑의 사례만 봐도 드러나듯, 품절될까 봐 조급해지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이 아닐까? 지금의 나라면 ‘남은 사은품 수’를 표시해서 혜택을 받기 위해 빨리 사야 하는 이유를 더 강조했을 것 같다.

물론, 위의 예시 역시 완벽한 대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비스의 궁극적인 목표와 이에 해당하는 비즈니스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이고 타당한 가설을 만드는 것으로 기획을 시작하는 것은 오퍼레이터를 기획자로 바꿔주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매장을 만들었다면 그 매장에 적합한 상품군과 그 매장의 성공, 실패에 대해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요청에 대한 분석과 고민의 깊이가 기획자의 역량을 결정한다.

마무리

오퍼레이터와 같은 상태에서 반복되는 운영 기획은 매너리즘과 성장에 대한 불안을 만들지만, 요청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며 진행하는 운영 기획은 반복될수록 더 가치가 있다. 동일한 조건에서 자사의 서비스와 고객, 그리고 실제 현업의 역량과 목표에 대해 지식이 수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들은 아무리 정책서를 많이 본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훌륭한 교훈이다.

앞서 인하우스 기획자의 역할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로스 해킹이나 데이터를 활용한 운영 개선 기획의 중요성은 점점 더 강조되는 추세다. 주니어 기획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축’은, 그 과정은 창의적이고 멋져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누구도 그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이 온라인 초창기라면 눈에 띄게 멋진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루에도 수천 개의 서비스가 세상에 출시되는 지금 성장하지 않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에 가깝다. 서비스 기획자에게 운영하는 프로덕트의 비전이란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스스로 오퍼레이터처럼 느껴지고, 기획 일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지고 있다면,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혹시 바쁘다는 핑계로 서비스 기획자로서 고민의 깊이를 습관적인 수준으로 두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의 깊이를 한 단계만 더 깊게 하면, 작은 배너 인벤토리를 추가하는 단순한 기획 건이라고 해도, 현업에서 진행 중인 비즈니스의 고민과 방향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이런 지식을 쌓아나가면 적어도 이 서비스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넓은 시각을 가진 서비스 기획자로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같은 지식은 하나의 기획 도메인을 폭넓게 이해하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남들 눈에 오퍼레이터처럼 보인다고 해도 괜찮다. 오퍼레이터처럼 보이는 일에서도 오퍼레이터가 아닌 기획의 역량을 키우는 중이라면, 주변의 협업하는 그 누구든지 그 깊이를 알아보고 더 큰 기회를 주려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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